기념물

홈 > 울주군소개 > 문화재, 유적지 > 기념물

박제상 유적
제1호 박제상 유적
박제상은 신라 눌지왕 시기 활동한 충신이다.『삼국사기』에서는 신라 시조 혁거세(赫居世)의 후손으로 제5대 파사이사금의 5대 손이며 할아버지는 아도갈문왕(阿道葛文王), 아버지는 파진찬(波珍飡) 물품(勿品)으로 되어 있다. 당시 신라는 고구려 및 왜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내물왕의 둘째아들 복호를 고구려에, 셋째아들 미사흔을 왜에 볼모로 보내었다.
자세히보기
언양 지석묘
제2호 언양 지석묘
​언양 지석묘는 규모로 보아 영남지역 일대에서 가장 큰 바둑판식 고인돌이다. 지석묘의 상석은 길이 8.5m, 너비 5.3m의 덮개돌이 사다리꼴 모양으로 비스듬히 놓여 있다. 지석은 6매 정도이고, 받침돌 크기는 2.8m〜3.1m 정도로 거대한 편이다. 서부리 주민들은 이 지석묘를 ‘용바우’라고 부르며, 민속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치성을 드렸다고 한다. 아직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지하의 돌방 형태나 출토 유물은 알 수 없지만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덮개돌이 매우 큰 것이 특징이다.
자세히보기
간월사지
제5호 간월사지
간월사터는 간월산 해발 215m정도에 동쪽방향으로 위치하고 있으며, 폐사된 이후 주위가 대부분 경작지로 이용되었다. 1984년 학술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며, 그 뒤 현재의 모습으로 정비되었다.
자세히보기
위열공 김취려의 묘
제7호 위열공 김취려의 묘
김취려(?~1234)는 언양현 사람으로 아버지인 김부는 예부시랑(禮部侍郞)을 지냈다. 그는 1216년(고려 고종 3)부터 1219년(고종 6)까지 거란군의 여러 차례 공격을 물리쳐 나라를 어려움에서 구하였다. 당시 13세기 동아시아의 정세는 몽골이 크게 흥기하고 있었으며, 거란 역시 몽골의 공격을 받아 1216년 압록강을 건너 고려의 북방지역으로 밀려오게 되었다. 이때 김취려는 대장군으로 조양진(평안남도 개천시 조양)에서 거란군을 물리쳤고, 연주(평안북도 영변군)에서도 거란군의 포위를 돌파하였다. 이에 거란군은 청새진(淸塞鎭: 평안북도 희천)을 넘어 퇴거하였다. 이 전투에서 맏아들이 전사하였다.
은현리 적석총
제8호 은현리 적석총
적석총(積石塚,돌무지 무덤)은 선시시대부터 역사시대의 고구려, 백제 초기에 나타나는 묘제의 한가지로, 일정한 구역의 지면에 구덩이를 파거나 구덩이 없이 시체를 놓고 그 위에 돌로 쌓은 무덤을 말한다. 고구려의 경우 초기에는 강돌을 주로 사용하였으나, 이후 깬 돌을 계단식으로 쌓아올려 무덤을 만들었다.
방기리 알바위
제10호 방기리 알바위
알바위는 알[卵] 모양의 구멍들이 있는 바위라는 뜻이다. 이 구멍들은 돌 표면을 쪼아서 형태를 잡은 다음 회전 마찰을 통해 다듬은 것으로, 성혈(性穴)이라고도 한다. 주로 고인돌의 덮개돌이나 자연암반에 새겨지며, 흔히 ‘알구멍’, ‘알바위’ 등으로 불린다. 성혈은 주로 태양, 여성의 성기 등을 상징하며, 이는 풍요와 다산의 의미로 해석된다.
서생 이길봉수대
제15호 서생 이길봉수대
서생면 나사리 봉대산(해발121m) 정상에 위치한 이길봉수대는 남서쪽으로는 아이봉수대에서 봉수를 받아 하산봉수대로 신호를 보내었다. 대응 봉수노선의 거리는 남서쪽 아이봉수와 5.8㎞, 북쪽 하산봉수와 4.2㎞이다. 봉수대의 중심시설인 연대는 원형에 가까우며, 하부 둘레가 30m 정도로 현재 북쪽부분이 많이 허물어진 상태이나 남쪽부분은 비교적 잘 남아있다. 연대주변에는 남쪽을 제외하고 방어용 호(濠)의 시설이 있으며 그 폭은 3m 내외이다. 호의 안쪽으로 일부 석축을 한 구간도 확인이 되며, 이는 봉수대를 외적이나 야생 짐승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시설로 추정된다.
언양 부로산봉수대
제16호 언양 부로산봉수대
삼남면 교동리 마을 뒤 봉화산이라 불리는 산의 정상에 부로산 봉수대가 있다. 정상 20m의 평지에 1∼3m 높이로 둥근 담을 쌓아 놓은 것이 봉수대의 흔적이다. 특이한 것은 20m 너비의 봉수대 안에 지름 3m의 둥근 웅덩이를 만들어 두었다. 이 봉수대는 양산의 위천 봉수대에서 신호를 받아 두서면의 소산 봉수대로 전달하는 역할을 하였다.
언양 천전리성
제19호 언양 천전리성
언양 천전리성은 울주군 상북면 명촌리 산성산(山城山)의 8부 능선을 따라 돌로 쌓은 테뫼식 산성이다. 삼국시대에서 조선시대까지 주로 왜구 방비를 목적으로 축조한 산성으로 추정된다.『언양읍지(彦陽邑誌)』에는 “둘레가 2천 척(尺)이고, 성 안에 우물이 있다”고 했으며, “임진왜란 때에 의병(義兵)들이 주둔했던 곳”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 성은 임진왜란 때 언양지역의 의병 활동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곳임을 알 수 있다.
대대리 고분
제20호 대대리 고분
대대리 고분은 울산에서 부산으로 가는 7번 국도변에 단독으로 위치하고 있으며, 주변에서 확인된 삼국시대의 무덤이 산등성이에 위치하는 것과 달리 평지에 위치하고 있다. 정식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내부 유구의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봉분의 높이 등으로 보아 6세기경에 만들어진 석실묘(石室墓)로 추정된다.
제21호 은편리지석묘군
제21호 은편리지석묘군
은편리 지석묘군은 북서쪽으로 뻗어 내린 국수봉의 나지막한 능선 자락에 위치하며 현재 은편리 숲안마을의 서쪽 편에 있다. 이 지석묘군은 바둑판식으로 추정되며, 3기(基)의 지석묘가 한 장소에 모여 있다. 이 지석묘군은 청동기시대 두동지역의 정치·사회·문화 등을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향산리 지석묘
제22호 향산리 지석묘
향산리 지석묘는 상북면 향산리 함박들 맞은편에 위치하며, 상북면 일대에 남아 있는 가장 큰 지석묘 가운데 하나로, 그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현재 남아 있는 덮개돌은 길이 310cm, 너비 300cm, 두께 90cm정도이다.
지내리 지석묘
제23호 지내리 지석묘
지내리 지석묘는 바둑판식으로 언양 송대리에서 상북 지내리의 신리마을로 연결되는 작은 길가에 위치한다. 현재 남아 있는 덮개돌은 길이 290cm, 너비 280cm, 두께 170cm 정도로, 받침돌로 보여지는 것은 4매가 관찰되며, 상석단면은 삼각형이다.
율리 영축사지
제24호 율리 영축사지
영축사지(靈鷲寺址)는 영축산, 문수산, 남암산 등 사면이 산등성이와 구릉으로 둘러싸여 있고 구릉 능선 말단부의 평지에 위치한다. 영축사지 주변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사찰인 망해사지와 청송사지가 1㎞내외의 거리에 있어, 이 일대가 통일신라시대 울산 불교문화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인보리 지석묘군
제26호 인보리 지석묘군
인보리 지석묘군은 백운산에서 동남쪽으로 뻗어 있는 구릉의 끝부분에 위치하고 있다. 이 일대는 언양에서 경주로 연결되는 곳으로 유적 주변의 구릉일대에서 무문토기가 많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반곡리 지석묘군
제27호 반곡리 지석묘군
반곡리 지석묘군은 반곡리 옥동마을 저수지옆 경작지에 위치하며, 서로 80m정도의 거리를 두고 각각 1기씩 자리잡고 있다. 이 일대는 고헌산의 동남쪽 능선자락으로 지석묘는 해발 30~40m정도에 있다.
복안리 지석묘군
제28호 복안리 지석묘군
복안리 지석묘는 천마산의 동쪽 구릉 하단부인 두서면 복안리 음지마을 뒤쪽 계단식 경작지에 위치하고 있다. 주변 일대의 야산과 경작지에는 청동기시대에 해당되는 토기가 확인되고 있다. 덮개돌은 화강암으로 반듯하게 놓여 있는데 한쪽이 깨어져 있으며, 크기는 길이 390㎝,너비 340㎝, 두께 140㎝이다. 아래에는 받침돌 1개가 관찰되는 것으로 보아 바둑판식 지석묘로 추정된다. 내부 구조는 학술 조사를 실시하지 않아 자세히 알 수 없다.
만화리 지석묘
제29호 만화리 지석묘
만화리 지석묘는 1기로서 두동면 만화리 비조마을 회관 옆에 위치하고 있다. 덮개돌은 화강암으로 비스듬히 뉘어 있으며, 네모꼴에 가까운데 크기는 길이 260㎝, 너비 185㎝, 두께 120㎝정도이다.
검단리 지석묘군
제32호 검단리 지석묘군
검단리 지석묘군은 웅촌면 면소재지에서 고연리로 연결되는 도로 옆에 3기가 모여 있는데, 덮개돌은 화강암으로 논두렁에 비스듬히 놓여 있다. 크기는 3기중 제일 큰 것이 길이 300㎝, 너비250㎝, 두께 50㎝정도이다.
대대리 상대고분
제34호 대대리 상대고분
대대리 상대 고분의 일대에는 삼국시대 무덤이 조밀하게 분포하고 있다. 이 중에서도 이 고분은 지름 15m, 높이 2.5m 정도로 비교적 뚜렷하다.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내부구조나 시기 등을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주변에서 채집된 토기편과 외형의 특징으로 보아 이 고분의 주인은 상당한 세력을 가졌던 인물로 추정된다.
문수산성지
제34호 문수산성지
문수산성은 문수산(해발 599m)의 8부 능선에서 정상을 따라 테를 두르듯이 쌓은 테뫼식 산성이다. 성내에서 수습된 토기편과 기와편 등으로 볼 때 삼국시대에서 조선시대까지 울산·언양 일대를 방비할 목적으로 축조된 산성이라고 추정된다. 자연 유실로 훼손이 심하지만, 체성(體城)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서로 물리는 방식으로 협축(夾築-성벽의 안팎을 모두 수직에 가까운 석벽으로 쌓는 방법)하였으며, 그 단면은 사다리꼴이다.
서생포 만호진성
제35호 서생포 만호진성
조선시대 전기 울산에는 서생포 만호진성, 염포진성, 개운포진성 등 세 곳의 수군진성(水軍鎭城)이 있었다. 진성은 국경 및 해안지대 등 국방상 중요한 곳을 보호하는 성을 가리킨다. 서생포 만포진성은 구릉의 경사면과 평지를 연결하여 축조한 포곡식(包谷式) 성이다.
하산 봉수대
제36호 하산 봉수대
봉수는 높은 산에 올라 밤에는 횃불과 낮에는 연기로 적의 동태나 민정 상황 등을 알렸던 통신제도이다. 군사적인 목적으로 봉수가 사용된 것은 고려 중기로 추정되며, 1149년(의종 3)에는 봉수의 거화수(炬火數)를 규정하고, 봉수군에게 생활의 대책을 마련해주었다.
삼동 하잠리 요지군
제37호 삼동 하잠리 요지군
조선시대에 청자(靑磁), 백자(白磁), 분청사기(粉靑沙器) 등을 굽던 가마터가 여기 저기 무리를 이루어 남아 있는 곳이어서 요지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곳에서 흩어진 채 발견되는 파편들로 확인된 그릇의 종류로는 대접, 접시, 종지, 병, 태항아리[胎壺], 합(盒)등이 있다. 수습된 파편 가운데 눈길을 끄는 것으로는 ‘언양인수(彦陽仁壽)’, ‘장흥(長興)’,‘순(順)’, ‘예(禮)’ 등 조선시대의 관청 이름과 관련이 있는 명문편(銘文片)들이 있는데, 가마터의 성격과 조업시기를 알려 주는 자료가 된다.
제43호 운흥사지
제43호 운흥사지
운흥사는 신라 진평왕(재위 579∼632)시기,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이후 고려 말 지공대사가 중건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1614년(광해군 6)에 대희선사가 재건하였다. 『조선왕조실록』,『신증동국여지승람』등에 운흥사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다. 그러나 1749년(영조 25)『학성지』의 기록에 의하면 이미 폐사되고 없었으므로, 그 이전에 폐사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제46호 울주교통리 생활유적 발굴 조사 전경(관련사진 울산문화재 연구원 제공)
제46호 울주 교동리 생활유적
교동리 생활유적은 울주군 교동리에 있는 경부고속도로 서울산 나들목의 서쪽 구릉 일대에 자리잡고 있다. 본 유적이 입지하는 구릉은 경부고속철도 역사가 있는 곳까지 이어져있으며, 구릉 전체에 청동기시대부터 조선시대의 유구가 분포한다. 이곳은 울산지역에서 가장 규모가 큰 청동기시대~삼한시대 취락유적이며, 청동기시대 취락연구에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