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산 여지승람 서(헌山輿地勝覽序)

  헌산은 영남의 아래쪽에 치우쳐 있는 고을로 징빙(徵憑)할만한 문헌이 없다. 내가 이 고을에 부임한 처음에 지리지(地理誌)를 찾다가 오래된 종이에 탈자(脫字)가 많은 기록을 얻게 되었다. 이것은 바로 숙종 경진년(1700)에 찬술한 것인데 옛 어른들의 입으로 전해오는 것과는 빠진 것이 많고 기록 또한 상세하지 않으며, 혹은 속된 어투를 사용하여 감히 읽을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읍지간행에 있어서 보충할 것과 바로 잡을 것을 진사 서석린(徐錫麟)에게 부탁하였다. 이때에 홍문관(弘文館) 학사(學士)가 지지(地誌)를 편찬하여 올릴 뜻이 있어 왕에게 알리고 왕명을 받들어 팔도(八道)에 전하였으니, 조정의 계획과 나의 견해가 우연히 합치된 것이다. 양식은 범례에 따라 조목조목 사실을 밝혀 왕에게 올리고 여분으로 또 한 부를 베껴 요람(要覽)에 대비하였다.

  내 생각건대 지지(地誌)의 상세함과 간략함은 관정(官政)의 다스려짐과 소홀함, 민속의 순수함과 투박함에 관계가 있다. 대개 지지에 실린 것은 산천(山川)과 사직(社稷)과 학교가 있고, 인물의 충효 의열(忠孝義烈)에 이르러서는 다만 아름답게 보이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 나라에 법전이라는 것은 진실로 산천의 신과 백성의 주인이 되는데 이끌어 가르치는 책임은 오로지 한 관리에게 전담하였다. 그 첫 번째 일은 진실로 덕을 높이고 어진 이를 드러내며 착한 일을 장려하여 나아가게 하는데 있으므로 여러 승람에서 찾으니 절로 넉넉한 스승이 있었다. 현대부(賢大夫)로 갈천선생 임훈(林薰)이 있고, 향선생으로 위열공 김취려(金就礪)가 있으며 그 아들 손자가 오현(五賢)에 이르렀다. 효자 신계은(辛繼誾)과 정종문(鄭宗文), 처사 정상인(鄭尙仁), 참판 김자(金자)는 모두 나라 안에서 드러난 분들이다. 관리였던 갈천선생을 스승으로 삼는 것은 속된 관리의 틀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며, 선비였던 김(金)·정(鄭) 제현을 스승으로 삼는 것은 삼가고 경계하는 선비 상을 실추 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 내 관사(官師)의 책임이 있으나 능히 남의 스승이 되지 못하는데, 갈천(葛川)은 죄인을 달갑게 여겨 목숨을 바치려 하였고, 위열공은 고을 유생들에게 스승이 됨에 그 마음으로 마지않았겠는가. 나에게 죄가 되는 것은 반드시 용 얘기와 그림의 떡으로 웃음을 전하고 한 부의 승람에 글을 지어 그칠 뿐이다. 그러나 이름난 정승과 훌륭한 사람의 남긴 교화와 착한 풍속은 힘입어 없어지지 않고 다만 헌산의 화악(花岳)과 더불어 한 지방에 머물러 진을 친 후에 반드시 보고 느낌이 있을 것이다. 단단히 마음먹어도 다스려지지 않는 것은 옛 사람으로 하여금 오로지 아름답게 하여 진실로 능히 열 집의 충신과 잊지 않는 미더운 선비와 더불어 덕에 나아가 자신을 성취하고 남을 성취시켜 주는 구역에서는 지지(地誌) 또한 도움이 없지 않을 것이다.

 숭정 기원후 정축년(1757) 동짓날 광산 김천상(金天相)은 평근당(平近堂)에서 쓰노라

  위는 정축년 여지지(輿地誌)를 수정할 때에 영관(瀛館, 홍문관)에서 신중함 없이 명을 내려 오로지 각 읍의 사무를 맡아 보는 사람에게 위임하였으므로 한계가 있지 않아 모두 외람되고 잡되다. 기묘년 겨울에 수찬 김응순(金應淳)이 바로잡을 것을 계의(啓議)하여 각도의 관찰사에게 거듭 타이르고, 관청에서 엄하게 명령하여 무릇 7 · 8차에 걸쳐 일한 것이 또한 이와 같다. 범례와 절목은 글자의 행과 글자 수와 지도 모양에 미쳤고, 그 나머지 각 항의 서법(書法)은 변하여 일정한 것이 없고 모순되어 합당하지 않다. 그러므로 수년간에 일을 주관하는 자는 붓을 잡는 일에 피로하고 각 고을의 스님들은 종이를 만드는 일에 병이 들자 관찰사가 관청에 있는 구간본 반포를 주청하였다. 여러 읍에서 그것으로 하여 먼저 각 조목의 위에 써서 감히 한 글자도 첨삭하지 않고 신증(新增)은 한결같이 경영하여 절목은 아래와 같다.

[주]
* 용(龍) 얘기: 용은 바로 용고기를 이르는 말로, 예로부터 용고기가 뛰어난 진미(珍味)로 일컬어져 왔기 때문에 한 말이다.